WebNovels

Chapter 48 - Chapter 48

항명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기에 다니엘은 명령에 따라 즉시 중대 인원을 차출하였다.

이후 주둔지 시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노르디아를 떠난 다니엘은 제 3군단 사령부가 위치한 마로바르크로 향했다.

출발 전 우려했던 기상악화는 일어나지 않았기에, 다니엘은 명령서에 적힌 시간보다 하루 일찍 마로바르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국군이 점령한 마로바르크는 노르디아보다 규모가 큰 도시였는데, 시민들은 도시에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모양인지 냉담한 시선들을 보내왔다.

‘이게 정상인데…….’

대체 왜 노르디아 시민들은 제국군에 열광한 것인지 다니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국의 병사들이 왕국의 시민들 사이에 섞여 거리를 활보하는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으니 운전병이 조심스럽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완전히 정차하자 다니엘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제국의 국기가 휘장처럼 걸려 있는 사령부 건물이었다.

밤하늘의 별빛을 배경 삼아 웅장하게 펄럭이고 있는 국기를 보고 있자니 없던 애국심도 생길 지경이다.

‘저렇게 큰 국기를 내걸다니, 병사들이 고생 좀 했겠는데.’

헛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내린 다니엘은 사령부의 정문에서부터 중령 한 명이 병사들과 함께 걸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니엘이 반사적으로 경례를 올리자 중령은 허허 웃으며 경례를 받아주었다.

“이거 제국의 영웅 다니엘 슈타이너가 아닌가! 기다리고 있었네. 나는 군단장님의 보좌관인 칼프렌이라고 하네.”

“영웅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보다 보좌관께서 저를 마중 나와주셨다는 건…….”

“아. 군단장님께서 자네를 기다리고 계시네.”

“……군단장님이 저를 말입니까?”

“그래. 도착하자마자 호출하는 건 경우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알다시피 우리가 시간이 촉박해서 말이야. 따라오도록 하게.”

군단장이 일개 소령을 기다릴 이유가 있나? 의아함이 들었지만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기에 다니엘은 보좌관 칼프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사령부 안으로 들어가서 연달아 계단을 오른 다니엘은 5층에 위치한 군단장 집무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눈치를 본다고 대답을 미루는 자를 싫어하니 의견이 있으면 명확히 내보이도록 하게.”

다니엘을 향해 조언을 한 번 해준 칼프렌은 집무실의 문을 툭툭 두드렸다.

“군단장 각하.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을 데려왔습니다.”

대답은 조금 뒤에 들려왔다.

“들여보내라.”

중후하면서 힘 있는 목소리다.

다니엘이 긴장하는 가운데 칼프렌이 문을 열어주었다.

문 너머에서 군단장 카를페터가 집무 책상 앞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 게 보인다.

그 뒤편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의 깃발과 제국 국기가 탁상기 형태로 교차되어 장식되어 있었다.

더해 벽면에는 온갖 전략 지도들과 작전판이 빼곡하게 걸려있다.

군단을 통솔하는 중장의 집무실이라는 게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다.

중장 카를페터 크라우.

그는 다니엘이 여태 만나 본 사람들 중 황녀를 제외하면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이었다.

남몰래 심호흡을 한 다니엘은 집무실 안으로 걸어가서 경례를 올렸다.

“군단장 각하. 저를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제야 카를페터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터운 눈썹 아래에서 푸른 눈동자가 번뜩인다.

얼굴에 나 있는 자잘한 흉터와 각진 턱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는 다니엘의 경례를 받아주고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다니엘 슈타이너. 참모 본부의 자료에 따르면 심문에 일가견이 있다더군. 왕국군의 레지널드 소령을 굴복시킨 것이나 황실 연회에서 스파이를 압박한 것을 보면 말이야.”

인사치레도 없이 처음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다니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각하. 그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겸손이 지나치군. 만약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운 또한 실력이라고 믿고 있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장에서는 더더욱 말이야.”

낮게 숨을 내쉰 카를페터가 두 눈을 반개한다.

“그러니 나는 그대의 운과 말솜씨를 빌리고자 하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나흘 후에 있을 종전 협상에서 그대를 협상 책임자이자 특사로서 보낼 생각이네.”

열중 쉬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다니엘의 손끝이 움찔 떨린다.

카를페터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협상 책임자라니? 내가?’

어이가 없었던 다니엘이 짧은 침묵 끝에 말했다.

“각하? 협상 책임자 자리에 저 같은 일개 소령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령부에는 다른 유능한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많지. 그래서 그 유능한 놈들을 보냈는데 결과가 뭔가? 협상 결렬이네.”

“하지만…….”

카를페터가 손을 들어 다니엘의 말을 제지하였다.

“괜히 책임감에 짓눌리는 것 같아 보여서 말해주자면, 나는 물론이고 사령부 또한 그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니라네. 사령부는 현재도 총력전을 검토하고 있으니까.”

또다시 협상이 결렬된다고 해도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진정하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할 건가 말 건가?”

카를페터가 한 쪽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다니엘을 떠보았다.

“저는…….”

거절하려고 했던 다니엘의 머릿속에서 한 순간 기발한 생각이 번뜩인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정말로 제국을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주먹을 꽉 쥔 다니엘이 카를페터와 시선을 마주쳤다.

“하겠습니다.”

일순간 바뀐 다니엘의 분위기를 읽은 카를페터의 두 눈에 흥미가 감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저를 협상 책임자로 명하신다면 그에 합당한 권한을 내려주십시오.”

“권한이라 하면?”

“제 3군단의 모든 작전 및 병력 현황을 열람할 수 있는 접근 권한이 필요합니다. 또한 나흘 후에 있을 3차 협상의 인원 배치를 제게 일임해주셨으면 합니다.”

카를페터는 잠시 말을 잃었다.

군단의 작전 및 병력 현황은 야전 2등급 기밀 사항이다.

아무리 참모 본부 소속이라고 해도 일개 소령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다니엘이 작전 참모로 일하면서 2등급 기밀 사항을 몇 번 접하기는 했겠지만, 그것들은 결국 군단 전체로 보자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 군단의 모든 2등급 기밀을 열람하겠다고?’

당돌한 것을 넘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세드릭이 왜 이 녀석을 예뻐하는 건지 알 것 같군.’

세드릭은 작전을 세움에 있어 ‘합당한 의외성’에 높은 가치를 둔다.

평범하지 않은 전술과 전략이 적들을 수렁으로 빠트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눈앞의 다니엘 슈타이너는 확실히 규격 외의 인물이었다.

그 누가 군단장 앞에서 군단의 병력과 작전을 모두 열람하게 해달라고 말하겠는가.

기개와 담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좋다.”

낮게 웃음을 흘린 카를페터가 다니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락하도록 하지.”

조커 카드에 판돈을 걸었으면, 끝까지 함께해야 하는 법이었다.

*

한편, 루시는 사령부 인근 호텔에서 목욕 후 몸의 물기를 닦아내는 중이었다.

본래는 마로바르크의 주둔군이 포화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하급 간부들처럼 다 허물어져가는 상업 건물들이나 학교를 빌려 숙식을 해결해야 했었다.

하지만 ‘본부 직할 부대’에다 제국의 영웅인 ‘다니엘 중대’라는 휘광까지 얻은 덕분에 사령부에서는 해당 중대의 간부들을 호텔에 모시라고 명하였다.

솔직히 다른 곳에서 숙식을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던 루시였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는 호텔에서 목욕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살 것 같아…….’

노곤한 몸을 이끌고 복도로 나온 루시는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다 말고 멈칫하였다.

현관문 아래로 전단지가 하나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

지금 즉시 혁명적인 음악의 시대가 열립니다!

탁월한 음질과 고풍스러운 디자인으로 여러분들의 음악 감상에 품격을 더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토레레 음반 가게로 오세요!

최고의 레코드판 컬렉션으로 여러분들을 모시겠습니다!

토레레 음반 가게의 장점이란?

• 최신 히트곡과 시대를 초월한 고전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 고급 스테레오 음향으로 최고의 음질을 경험해보세요!

• 여러분들이 아는 곡들은 물론 모르는 곡들까지 모두 진열되어 있습니다!

전단지를 지참한 채 가게에 음반을 구매하러 오시면 특별한 혜택이!

※ 전단지 지참시 모든 음반 15% 할인! ※

정말 완벽해! 놓쳐서는 안 되겠지요?

가게 위치는 아래 약도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

평범한 광고 전단지로 볼 수 있었지만, 루시의 눈에는 전단지의 우측 상단에 작게 튀어 나온 점자들이 보이고 있었다.

인근에서 활동중인 첩보 요원이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암호가 적힌 전단지를 넣은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무릎을 굽힌 루시가 전단지를 주웠다.

그대로 전단지의 점자에 손을 올린 루시가 눈을 감고 암호를 해석한다.

암호를 해석하자 여러 글자들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순서가 맞지 않았다.

다중 대체 암호의 일종이었다.

해당 암호를 순서에 맞게 배열하기 위해서는 코드북이 필요했지만, 루시는 코드북의 내용을 모두 외우고 있었기에 생략해도 괜찮았다.

글자의 순서를 재배치한 루시가 마음속으로 명령의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다니엘 슈타이너의 활약이 장차 연합국에 위해가 될 수 있음을 알림. 그의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켜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대책을 세울 것을 권고…….’

계속해서 암호를 해석하던 루시의 눈이 스르르 떠진다.

‘일차적으로 다니엘 슈타이너를 유혹하여 감정적인 지배권을 얻어낼 것을 명령……?’

저도 모르게 어깨가 흠칫 떨린다.

동요한 것인지 루시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 경험이 전무한 루시에게 있어서, 해당 명령은 너무나도 가혹했기 때문이었다.

More Chapters